호스피스 간호사가 본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
글 : 최화숙_한국호스피스협회 이사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배고파 죽겠다’는 식으로 ‘죽겠다’는 말을 무심코 자주 사용하지만 진짜 죽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한번은 80세를 넘은 말기 자궁경부암 할머니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반신 마비로 겨우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누구나 안 아프고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가봐요”라는 말 한마디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그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잘 준비해 당당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름답다. 또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한번쯤 어떻게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 자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필자 최화숙 1955년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간호과학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중앙대 대학원에서 간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인여대 정신간호학 겸임교수와 한국호스피스협회 이사, 한국 호스피스완화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화부터 내는 이들이 있다. 언젠가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던 중이었다.“기분 나쁘게 죽는 얘기는 왜 해요?”어디선가 격앙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주제로 한 워크숍 시간이었는데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이 발표할 차례가 되자 그만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는 조그마한 여행사를 경영하는 50대 중반의 사장으로 몇몇 부하 직원과 함께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해보고자 교육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며 목청을 높이는 그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와 가족을 전인적으로 돕는 프로그램으로 남은 생을 편안하고 의미 있게 살도록,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개 호스피스 종사자들이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환자와 가족이 이야기하기를 원하면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므로 호스피스 교육에서 ‘죽음’에 관한 것은 필수 항목이다.
그 그룹의 튜더가 호스피스 교육에서 죽음 문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한 것이 더욱 그 남성을 격앙시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화를 내고 두려워해도 죽음이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죽음을 선고받은 자
지난 19년 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전문적으로 해온 간호사로서 수백 명의 말기 환자와 가족을 만났는데 그들의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의료진과 가족에 의해 자신의 병황(필자 주: 진단명과 병의 현재 진행 상황)을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 크게 충격받는 모습이다. 너무 무섭고 놀라 정신을 못 차리거나 마구 화를 내며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암’으로 진단받은 한 남성은 무섭게 화를 냈다. 부인이 나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였는데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래” 하면서 자신은 단순 소화불량이라고 극구 주장했다.그는 진단받을 당시만 해도 수술하면 어느 정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였는데 그만 수술의 기회를 놓쳤다. 50대 후반이었던 그 남성은 소화제만 먹고 지내다 통증이 심해지고 상복부에 만져지는 덩어리가 생겨 8개월 만에 다시 병원에 오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완치 치료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의사가 환자의 병황에 대해 환자 자신보다 가족에게 더 자세하게 알려주고, 환자에게 알리는 임무는 가족에게 미루고는 한다. 그런데 의사로부터 직접 자신의 병황을 들을 수 있었던 임성준 씨의 경우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62세인 그는 회사를 두 개나 경영하고 있었다. 과로가 누적됐다는 생각에서 친구가 과장으로 있는 대학병원에 요양 겸 입원했다.
친구인 의사는 임씨가 ‘간암 말기’인 것을 알고 놀랐으나 회사도 정리해야 할 테니 본인이 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임씨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고, 의사는 마지못해 “교과서에 쓰여 있는 대로라면 3개월 정도일세”라고 대답했다. 순간 임씨는 온몸이 굳어 버리면서 이 마주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었다. 당황한 담당의사가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호스피스 사무실로 연락을 해왔다.
임씨의 병실로 올라가 보니 의사의 말대로 임씨는 온몸이 경직돼 스트레치카(환자의 이동을 위한 바퀴 달린 침대)에서 침대로 옮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무서운 괴물이라도 본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두 무릎을 세운 자세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환자 곁에 둘러서 있는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처음 의사로부터 ‘암’이라거나 ‘말기 상태’라는 통고를 받으면 대부분은 충격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설마, 사실이 아니겠지’하며 부정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적 반응이 나타난다.
김상복 씨 역시 그런 반응을 나타낸 분이었다. ‘간경화를 동반한 말기 간암’으로 진단받은 그는 처음 자신을 진찰한 의사를 “나아뿐(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부인 역시 “무신 그리 나아뿐 사람이 다 있노? 우찌 그리 무서븐 이야기를 한 번에 다 그리 할 수 있노” 하며 역정을 냈다.
그 의사는 김씨 아들의 친구였는데 진단 결과는 그에게도 놀라운 것이어서 충격을 완화해 드리고자 두 분을 자기 연구실로 모시고 가서 차를 대접하며 조심스럽게 알린 것이었다. 김씨의 부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무섭고 놀라워 무릎이 덜덜 떨리고 떨어지지 않아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김씨와 그 부인으로서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의사에게도 말기 상태라는 병황을 알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어 명의 말기 환자를 우리 호스피스에게 의뢰한 40대 후반의 한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참담한 표정이었다.
“내가 못나 그래, 내가 못나서….”창밖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자신이 못난 의사여서 의료 실패로 고칠(완치)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죽음’과 관련된 화두는 직접 경험해야 하는 이에게는 물론 말하는 이에게나 듣는 이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란 두려워하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누구나 맞이하는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미래의 일이고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종교적 교훈 외에는 아직 가보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미리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어느 정도 잘 맞이할 용기가 생기지만 그것이 자기의 문제가 되면 또 다르다. 이런 충격이 어떤 면에서는 당사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가족이나 이웃들이 알려주는 선의의 정보가 환자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많다.
김상복 씨의 경우가 그랬다. ‘간암’ 진단을 받은 이후 그는 “저~기 어디에 가면 간암을 잘 고치는 용한 (한)의사가 있다” “혈관색전술(필자 주: 암세포 주변 혈관을 막아 영양공급을 차단하는 시술. 방사선과 의사가 시술하는데, 대개 4주 간격으로 시행하되 반응이 좋으면 여러 번 하기도 한다)을 해도 소용이 없고 서너 달 지나면 죽게 된다더라”
“아니다. 혈관색전술을 적어도 세 번은 해보아야 한다더라. 어느 마을의 누구는 혈관색전술을 세 번 하고 건강해져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더라”는 등 여러 가지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죽음, 누구나 맞이하는 종착역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녀를 비롯한 친지들이고 모두 조금이라도 김씨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이니…. 이런 혼돈의 시기를 겪으면서 김씨는 어떻게든 치료해 보고자 서울에 있는 아들집으로 올라와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는데 같은 결과가 나왔다.
김씨는 75세였으나 간암 진단을 받은 환자로서는 그래도 당분간 치료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암세포 덩어리가 한 곳에만 있어 혈관색전술과 함께 항암제 투여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의사가 입원을 권유했다. 가족들의 이야기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김씨는 혈관색전술을 세 번은 해보겠다고 결정했다.
혼돈의 시기를 거쳐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나면 환자들은 조금은 평온해 한다. 김씨 역시 약간의 안정을 찾게 되었고, 가족들은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혈관색전술 시술을 위해 입원한 후 1차 시술에서 반응은 좋았으나(암세포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환자 본인은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다.
김씨는 “이게 사는 기가” 하면서 한숨을 쉬고는 했다. 그러던 얼마 후 김씨는 사업을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2차 시술 후 김씨는 아들집이 아닌 지방에 사는 큰딸네 집으로 퇴원하겠다고 했다. 부인은 그 몸으로 어떻게 가느냐며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혹시 환자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자녀들 집을 한 번씩 둘러보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환자의 뜻을 존중해 드리도록 조언했다. 큰딸네서 4주를 보내고 다시 입원해 3차 시술을 받은 김씨는 이번에는 둘째딸네로 퇴원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둘째딸은 평소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나 병든 아버지를 돌봐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고마워하면서 어느 사이에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풀리더라고 했다. 3차 시술 이후 종양의 크기가 오히려 조금 커진 것으로 나타나자 김씨는 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과 작별인사 나누는 시간
집으로 돌아간 김씨는 여느 간암 말기 환자들과 달리 별반 불편한 증상이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김씨는 혼자 남을 부인을 위해 기력이 떨어져 가면서도 할 수 있는 한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온실을 가꾸기도 하고, 안방의 형광등도 갈고, 겨울에 대비해 보일러 탱크에 기름을 채워 넣기도 하며…. 그럴 때마다 저어하는 부인에게 김씨는 오히려 “다 당신을 위해 그라는 기라. 이 다음에 나 없으면 괜히 자슥들 집에 가지 말고 혼자 살그래이. 온실이나 들여다보면서…” 하고 당부하더라고 했다.
그 얼마 후 김씨는 밤중에 식도정맥류파열(필자 주: 말기 간암 환자들에게 흔히 올 수 있는 증상으로 평소에 커져 있던 식도정맥이 터지면서 다량의 출혈이 있다)로 갑자기 피를 토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날 오후 돌아가셨다.
병황 통고를 받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지낼지 결정하는 것은 환자와 가족의 몫이다. 환자 중에는 가족과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처음 담당의사의 의뢰서를 받고 전화했더니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라고 하던 한 중년 여성이 생각난다. 50대 초반의 이정희 씨였다. 이씨는 대장 바깥 쪽에 생긴 좁쌀 만한 덩어리가 커져 말기 상태로 진행된 암환자였는데 인공항문수술을 한 후 항암치료에 반응이 없어 호스피스에게 의뢰된 경우였다.
의지가 굳고 생활력이 강하던 이씨는 의사의 병황 통고도 혼자 가서 들었을 정도로 강한 여성이었다. 종양 세포가 항암제에 반응하지 않으니 이 상황에서는 호스피스 간호가 가장 적절하다는 담당의사의 권고를 받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며칠 동안 이씨는 의사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뿌리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호스피스 간호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씨는 첫 전화 후 1주일 만에 딸을 통해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가족의 입장은 또 달랐다. 결혼 후 거의 평생을 남편과 동업자로 일해 온 이씨가 남편에게는 커다란 의지였기에 남편은 아내가 말기 상태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이씨의 큰딸 역시 “엄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에요. 늘 무슨 일에나 흔들림 없는 산 같은 분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저렇게 무너지려고 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의 경우 환자는 이미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가족들이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본인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이씨는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을 때 미리 남편과 몇 가지 사안을 의논해 두고 싶어 했으나 남편의 반응은 달랐다. 부인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말을 못하게 하고 “당신 말이야,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기도 열심히 하면 곧 나을 수 있어” 하면서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암환자에게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 먹으라고 강권했다. 당시 이씨의 상태는 복강에 암세포가 차고 장폐색이 서서히 일어나 무엇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으나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자원봉사자가 주도하는 가정호스피스
참다 못한 이씨가 호스피스에게 하소연했다.
“그 마음 알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내가 자기를 이해해야 해요, 자기가 나를 이해해야 해요?”
안타까워하는 이씨는 이미 목소리마저 어눌해진 상태였다. 호스피스 사무실에서 따로 만난 이씨의 남편은 남편대로 누구에겐가 자신의 답답하고 터질 것 같은 심경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알고는 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것이 기정사실화될 것 같아 두려웠어요.”
그래서 부인이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면 애써 부정하며 화두로 삼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1시간 남짓 이야기를 들어주자 이씨의 남편은 그제서야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드디어 환자와 가족이 함께 남은 여정을 걸어갈 준비가 된 것이었다.
이경자 씨 역시 그랬다. 이씨는 특히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니 호스피스 시설로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무렵 시설에 입원할 자리가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기하는 기간만이라도 가정호스피스 간호를 받기로 하고 우리 기관에 임시 등록했다.
40대 후반인 이씨는 유방암 말기 환자로 폐와 뼈·뇌에 전이가 있는 상태였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수술하고 항암치료하고 방사선 치료하느라 집을 팔았다고 했다. 호스피스에 등록할 당시에는 조그마한 임대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의사·간호사·성직자·사회복지사가 일반 자원봉사자와 함께 번갈아 환자의 집을 방문해 도움을 주었는데 이씨에게는 그것이 몹시 고마웠던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방문했더니 평소와 달리 얼굴이 밝았다. 남편이 열심히 간병해도 이씨의 얼굴에는 늘 구름이 끼어 있었고 입술에는 짜증이 달려 있어 가족들도 살얼음을 딛고 사는 듯 늘 조심스러워 했는데 그날은 환자가 웃으니 가족들도 모두 웃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세요” 하고 묻자 이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오늘 동태찌개를 먹었어요. 제가 동태찌개를 제일 좋아하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이웃에 사는 자원봉사자가 저녁식사를 위해 준비한 동태찌개를 한 그릇 가져왔는데 그것을 두어 술 먹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는 만족감이 가득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은 가정호스피스에 등록한 지 2주 정도 되어 마침 시설 호스피스에 자리가 생겼다고 연락이 온 날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가정호스피스 간호를 받고 있으니 시설에는 입소하지 않겠다면서, 왜 애초에 집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는지를 말해 주었다.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후회 없는 죽음이기를…
남편이 경제 능력이 없어 자신이 그동안 살림을 꾸려 왔는데 그 와중에도 여자 문제가 있어 자신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었다고 했다. 더구나 이씨는 완벽주의자였는데 남편은 그것을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의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지난 이야기를 하는 이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편 역시 이씨의 태도로 인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연하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호스피스 간호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씨도 사실은 마지막까지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으나 자존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이후 이씨는 한 달 정도 더 집에서 남편, 두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이씨는 고등학교 3학년인 작은아들이 지원할 대학과 학과까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어떤 환자는 호스피스에 등록하고 나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지는 않는 건데”라며 후회를 많이 했다. 남편이 은퇴하면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하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느라 특히 친지들에게까지 차마 인간으로는 못할 짓을 많이 했다고 했다. 이제 남편이 은퇴해 세계일주 여행을 가려던 참에 말기 암으로 눕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뒤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돈은 부인이 죽은 후 남편이 재혼한 여자와 함께 여행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나를 게스트로 초청했던 어떤 프로그램의 아나운서가 생각난다. 그는 대담이 끝난 후 웃으면서 “나는 예순 살이 넘었으나 한 200년쯤 살 거예요. 아직 죽음은 나와 거리가 멀어요”라고 말했다. 유명인인데다 열심히 사는 그분에게 아직 죽음은 생소한 모양이었다.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그 유명인처럼, 아직 자신에게는 살 날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목적 성취만을 위해 달려가던 사람, 특히 ‘워크홀릭’이라고 할 정도로 일에만 매달리던 사람, 그리고 내세는 없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어느 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 크게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지나간 삶을 파노라마처럼 돌이켜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물인 인간은 대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보편적 진리에 따라 인생을 살아온 사람, 내세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마지막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어떤 이들은 죽음이 어떻게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만, 미리 생각해 보고 준비한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건강할 때, 잘나갈 때, 한 번쯤 멈춰 서서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월간중앙 2005년 10월 01일